지난 주말 위키드2를 보고 왔다. 1편에서는 글린다의 사랑스러움 그리고 서사의 구조가 꽤 선명했다고 생각했는데 2편에서는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도 잘 모르겠고 글린다의 사랑스러움도 영화 전반적으로 색채가 어둡게 깔리면서 줄어들었다고 느껴졌다. 지금부터는 내가 위키드2를 보고 느낀 점을 이야기 해보겠다. 아마도 제작사에서 표현하고 싶었던 이야기랑은 많이 다를것이다.
기술로 세워진 ‘마법사의 도시’
오즈라는 도시는 처음부터 주어진 무대가 아니다. 영화 속에 표현되는 높은 망루와 같은 건물, 도시를 가로지르는 전차와 전철, 하늘을 오가는 열기구는 “마법사의 도시”라는 이름으로 묶여 있지만 실제로는 기계공학과 설계, 인프라 구축의 결과물이다. 마법사가 손짓 한 번으로 만든 세계가 아니라, 설계도와 자재, 노동과 시행착오 위에 세워진 도시인 것이다. 마법이 일종의 혈통이자 신분처럼 작동하는 세계에서, 아무 배경도 없는 이방인이 기술만으로 이런 도시를 끌어올렸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입지전적인 사건이다.
도시가 풍족해지고 사람들의 삶이 안정되면, 다음 질문은 자연스럽게 정치의 영역으로 옮겨간다. 이 도시를 앞으로 어디로 이끌어 갈 것인가. 마법사는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여겼을 것이다. 누구보다 도시의 구조를 잘 알고, 어떤 장치를 더해야 효율이 오르는지, 어떤 제도를 도입해야 더 멀리 나아갈 수 있는지 계산할 수 있는 사람. 그러나 이 세계의 언어로 볼 때 그는 치명적인 약점을 갖고 있다. 혈통도, 마법도 없다. 태어날 때부터 권력의 후보로 간주되던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그는 권력을 얻기 위한 다른 언어가 필요했다. 그게 바로 “마법이 있는 것처럼 비춰지는 연출”이었다.
마법이 아니라 ‘정치의 언어’로서의 연출
마법사가 선택한 연출은 거짓이라기보다 번역에 가깝다. 이 세계 사람들은 위에서 내려오는 마법적 권위를 이해할 준비는 되어 있지만, 외부에서 온 기계기술자를 지도자로 받아들일 준비는 되어 있지 않다. 자신의 계획을 추진하고 도시를 더 큰 스케일로 키우기 위해, 그는 자신을 마법의 언어로 번역해야 했다. 거대한 얼굴, 압도적인 조명과 음향, 보이지 않는 곳에서 움직이는 기계장치들은 그 번역의 도구였다. 실체는 기술자지만, 이 세계가 이해할 수 있는 형식은 마법사였던 셈이다. 마법사가 만든 가면은 욕심과 공포의 산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쌓아 올린 도시의 다음 단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정치적 형식이기도 하다.
서로 다른 모양의 기득권, 글린다와 엘파바
이제 글린다와 엘파바를 그 옆에 세워 보자. 글린다는 명백히 백그라운드가 있는 인물이다. 좋은 집안, 좋은 교육, 자연스럽게 사람들 앞에 설 수 있는 이미지. 이 세계가 기대하는 “위에서 통치할 사람”의 전형에 가깝다. 엘파바는 겉으로 보기엔 완전히 다르다. 차별받고, 외모로 낙인이 찍힌다. 그러나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강력한 마법적 재능을 타고났다. 시스템이 그를 밀어내려 할수록, 역설적으로 그의 재능은 더 또렷하게 드러난다. 둘은 서로 다른 모양이지만, 공통적으로 “타고난 것”을 자본으로 가진 사람들이다. 혈통과 재능이라는 이름의 기득권이다.
이 구도로 보면, 마법사와 두 사람의 관계는 이렇게 정리된다. 마법사는 배경 없이 자기 힘으로 정상에 오른 사람이다. 기술과 기획, 연출과 실행력으로 도시를 세웠다. 그의 정상은 위에서 내려준 자리가 아니라 아래에서 올라간 자리다. 반대로 글린다와 엘파바는 태어날 때부터 위쪽과 연결된 사람들이다. 명문가 출신, 혹은 타고난 마법 엘리트라는 형태로 이미 체제의 상부와 맞닿아 있다. 그 둘이 힘을 모아 마법사를 끌어내리는 장면은 “기득권이 백그라운드 없는 자가 점령한 정상 자리를 되찾고 짖밟는 과정”으로 읽힌다.
정상의 자리는 누구의 것인가
영화 속에서 마법사에게 문제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그가 선택한 방식에는 분명 어두운 영역이 있다. 오해와 공포를 이용하는 장면들, 마녀사냥의 구조에 합류하는 모습은 충분히 비판받아 마땅하다. 다만 그 비판이 그의 능력과 성취까지 싹 지워버리는 순간, 다른 종류의 왜곡이 시작된다. 풍족한 도시와 활기찬 인프라는 그대로 남아 있다. 사람들은 여전히 전차를 타고 이동하고, 높게 쌓인 건물에서 일을 하고, 열기구가 오가는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러나 그 세계를 설계하고 끌어올린 인간은 “처음부터 자격이 없던 사람”으로만 기억된다. 업적은 남고, 이름은 지워지는 방식이다.
그래서 나는 글린다와 엘파바가 마법사를 끌어내리는 장면을 볼 때, 지방 호족이 입지전적인 창업 군주를 몰아내는 역사적 장면들이 떠올랐다. 피와 족보, 재능과 출신을 이유로 “원래 위에 있어야 할 기득권층”이 다시 자리를 되찾는 과정. 명분은 언제나 정의와 질서 회복이다. 그러나 결과만 놓고 보면, 배경 없이 자기 힘으로 정상에 오른 한 사람이 밀려나고, 정상은 다시 백그라운드가 있는 집단에게 돌아간다. 위키드2를 그런 시선으로 버먄, 영화는 조금 더 불편한 질문을 건넨다. 타고난 배경 없이 자기 힘만으로 정상에 오른 사람을, 우리는 어떤 기준으로 평가하고 어떤 방식으로 역사 속에 남길 것인가. 그리고 그 자리를 되찾아 가는 기득권의 움직임을, 언제까지 그냥 지켜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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