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통주 시장의 가능성을 이야기할 때마다 한국의 환경적 장점을 떠올린다. 한국은 대만처럼 고온 다습한 기후를 가지고 있어 숙성 효율이 높다. 이와 같은 기후적 특성은 술의 숙성 속도를 빠르게 하고 짧은 시간 안에 깊고 풍부한 풍미를 만들어낼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 대만의 카발란(Kavalan) 위스키가 세계적으로 성공한 것도 이러한 기후적 조건을 극대화한 사례다. 마찬가지로, 한국도 이러한 자연적 이점을 활용해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춘 전통주를 생산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한국의 증류주는 여전히 종가세라는 후진적 주세 체계에 묶여 있다. 맥주와 탁주에 종량세가 도입된 이후로 시장은 소규모 브루어리와 프리미엄 막걸리 같은 신제품들로 활기를 띠고 있지만 증류주는 제자리걸음을 걷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이 카발란 같은 글로벌 브랜드를 만들거나 중국의 마오타이(Moutai)처럼 거대 기업을 육성하는 것은 요원해 보인다.
종가세가 만드는 왜곡된 시장
현재 한국의 증류주는 종가세 체계 하에 있다. 이 방식은 술의 출고 가격에 따라 세금을 부과하는 것으로 고가의 프리미엄 증류주에 불리하게 작용한다. 같은 증류주라도 오크통에서 숙성된 고급 소주는 저가 희석식 소주보다 훨씬 높은 세금을 부담해야 한다. 이런 세금 구조는 고급 제품의 생산을 저해하고 제조업체들이 저렴한 제품에만 집중하도록 만든다.
반면 종량세는 술의 가격이 아닌 알코올 함량에 따라 세금을 부과하기 때문에 고급 제품과 저가 제품 모두 동일한 기준에서 경쟁할 수 있다. 종량세가 도입되면 소규모 증류주 제조업체들은 가격 부담 없이 품질 개선과 고급화 전략에 투자할 수 있다. 이는 전통 증류주의 고급화와 세계 시장 진출에 중요한 발판이 될 것이다.
희석식 소주, 종량세의 걸림돌?
하지만 종량세로 전환하는 데는 한 가지 문제가 있다. 바로 희석식 소주다. 희석식 소주는 주정을 희석해 물과 첨가물을 섞어 만든 술로 저렴한 가격 덕분에 한국 소주 시장을 사실상 지배하고 있다. 현재 희석식 소주의 가격 경쟁력은 종가세 체계에서 유지되고 있으며 종량세가 도입되면 소폭이지만 가격 상승이 불가피하다. 이는 소비자들에게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
또한 희석식 소주의 세금 체계를 종량세와 종가세를 병행하는 방식으로 유지한다면 한국의 주세 체계는 기형적인 구조가 될 수밖에 없다. 세금 집행이 복잡해지고 시장 투명성이 떨어질 위험이 생긴다.
해결책: 새로운 기준의 필요성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기준을 도입하는 것이 필요하다. 몇 가지 대안을 생각해볼 수 있다.
- 알코올 도수 기준 도입
일정 도수 이하의 증류주는 기존의 종가세를 유지하고 도수를 초과하는 제품에는 종량세를 적용하는 방식이다. 이는 저가 희석식 소주와 고급 증류주를 세법상 분리하여 각 시장 특성에 맞는 세율을 적용할 수 있다.
- 리터당 가격 기준 설정
증류주의 가격이 일정 수준(예: 리터당 몇 천 원)을 초과할 경우 종량세를 적용한다. 이 방식은 프리미엄 제품에 과도한 세금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도 형평성을 확보할 수 있다.
- 희석식 소주의 별도 분류
희석식 소주를 증류주와 별도의 카테고리로 분류하여 별도의 세율 체계를 마련하는 것이다. 이 방식은 희석식 소주의 가격 경쟁력을 유지하면서도 전통 증류주에 새로운 기회를 열어줄 수 있다.
고온 다습한 기후가 주는 가능성
대만의 카발란 위스키는 짧은 숙성 기간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풍미로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 한국 역시 대만과 유사한 고온 다습한 기후를 가지고 있어 짧은 시간 안에 깊고 풍부한 맛을 가진 술을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현재의 주세 체계는 이러한 잠재력을 발휘하기 어렵게 만든다.
또한, 중국의 마오타이는 고유한 지역성을 바탕으로 세계적인 증류주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한국 역시 고유의 전통 제조 방식과 기후적 장점을 활용한다면 충분히 마오타이처럼 세계적인 거대 기업을 육성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주세 개혁을 통해 전통 증류주가 고급화 전략을 펼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전통주를 위한 주세 개혁의 필요성
맥주와 탁주의 종량세 전환에서 우리는 이미 가능성을 확인했다. 소규모 브루어리와 프리미엄 막걸리 시장이 형성되면서 새로운 브랜드와 제품들이 소비자들에게 선택의 폭을 넓혔다. 같은 방식으로 증류주에서도 종량세가 도입된다면 소규모 증류주 제조업체들이 품질 개선과 혁신을 통해 새로운 바람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전통주는 고온 다습한 기후와 고유의 제조 전통이라는 강력한 경쟁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를 활성화하려면 주세 개혁이 필수적이다. 희석식 소주와 전통 증류주를 세분화한 세법 개편은 새로운 성장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주세 개혁이 이루어질 때 한국도 카발란과 마오타이처럼 세계적인 전통주 브랜드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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